10. 9. 27.

공정사회?

공정사회?...

참...  그 놈의 술수...

 

그 놈이 사랑하는 것과

그 놈의 주변에 있는 것들...

 

그 놈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못나서일까?

왜 그 놈은 평탄한 융단 위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가 보다.

그 놈의 모습이...

U-17 여자월드컵 우승을 보며 하는 생각

17세 이하 소녀들의 결승전은 역시 큰 감동을 주었다.

한장면 한장면을 가슴조리며 봐서인지 승부차기는 바로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다. 나이지리아, 스페인 모두 역전승으로 올라왔기에 승부차기도 이길 것 같았다. 한국 여자들은 뭔가 근성이 있으니까...

 

최덕주 감독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의 용병술이 각광을 받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다. 그라운드 밖에서 아이들을 독려하고 다독거리고 쓰다듬는 것을 보니 자상한 아버지 같이 보였다. '즐기는 축구'를 구사해야 한다는 최덕주 감독의 지론대로 아이들은 월드컵 기간 내내 밝은 얼굴로 경기에 임하는 것 같았다.

 

긴장을 너무하면 중요한 순간 실패하기 쉽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중요한 순간에  멋지게 마침표를 찍었다. 밝은 얼굴로 경기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결과였다.

 

그런데 하나의 가정을 해본다.

만일 우리의 아이들이 우승을 못했다면, 아니 예선전에서 패배하고 귀국해야 했다면 즐기는 축구에 대해서 지금 처럼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까?

 

우리는 오랬동안 사람을 때리는 식으로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본다. 특히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체벌은 승리를 담보하는 기술처럼 여겨졌다. 어렸을 때부터 승리를 위해 체벌당하고 긴장하고 독기있게 임하기를 강요당했다. 경기에서 이기면 체벌시스템은 확실한 보증을 얻는다. 행여 경기에서 패하면 정신상태 운운하며 체벌시스템을 강화시켰다.

 

최덕주 감독이 예선탈락을 하고 왔다면 응당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마치 최덕주 감독의 '즐기는 축구'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연결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포츠의 승패는 운도 따르지만 과학적인 원인이 대부분이다. 체계적인 육성프로그램, 치밀한 훈련계획, 과감한 투자 등 과학적인 접근이 스포츠 세계에서 승리의 보증수표라는 것을 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국가나 하나의 단체를 대표해서 겨루는 스포츠에서 승리는 중요하지만 스포츠의 참된 의미는 '즐거운 놀이'가 아닐까?   패배는 노력의 동인이지 죄는 아니다. 승리와 패배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에서도 일상적인 일이듯 스포츠에서도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승리를 위해 노력을 하되 그 노력은 '즐거운 경험'이 되어야 한다. 패배를 하면 다음의 승리를 위해 즐겁게 노력하면 된다.

 

 

어린 아이들이 준 감동과 행복은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만큼  스포츠는 즐거운 놀이이고 이기면 좋고 져도 다음에 이기면 되는 놀이라고 생각되었으면 좋겠다.

 

 

 

 

 

 

 

10. 9. 22.

개처럼 취급당하며 학교를 다녔기에...

며칠 전 경기도 의회에서 '초 중 고교' 학생 체벌 전면 금지와 두발 자유화 등을 뼈대로 한 '경기도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됐다고 한다.

애들 너무 구속하지 말고 때리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문득 내 학창시절이 생각난다. 박정희씨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초등학생이였고 전두환이가 집권했을 때 중고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선생님에게 맞는 일이 당연한 것이였다.  잘못하면 응당 맞아야 하지만 별 잘못을 안해도 맞은 적이 많았다. 또 사소한 잘못에도 지나치게 맞는 경우도 허다했다. 

 

체육선생님과 교련선생님들은 응당 학생체벌의 선두주자였다. 어쩌다 신입교사들이 체벌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그들도 얼마지나지 않아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교사들만 체벌한 것은 아니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위계질서는 강했다. 1년 선배인 학생에게도 맞는 일이 적잖았다.

 

우리 모두는 그 당시 '사람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를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동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지난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친구들과 나누었던 우정을 제외하고는 좋은 추억이 없다. 고등학교시절 선생님들을 말하는 자리에서 나와 친구들은 모두 선생님이었던 자들에게 '~새끼'라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2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나도 '~새끼'라고 기억되는 교사들에게 복종하며 때로는 반항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금 발표되는 학생인권조례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의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다. 그들의 머리 속은 '학생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라고 각인되어 있다.

맞지 않고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 자라지 않았기에 자유스러워지면 학생들이 미친 소마냥 날뛰고 학교의 교육은 파행으로 갈거라고 생각한다.

 

개처럼 취급당하며 학교를 다녔기에 개처럼 취급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누구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한다. 강렬한 에너지는 강한만큼여러가지 돌출행동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런 돌출행동들을 때려서 억누르는 것은  피동적인 복종만 부르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능동적인 복종을 어떻게 하면 유발시킬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하고 노력했어야 했다.

 

SBS 모 프로그램에서 대책없는 아이들이 전문가의 교육에의해 180도 바뀌는 것을 본다. 그 전문가들은 아이를 개처럼 대하지 않고 인간처럼 대하며 스스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고쳐낸다. 아이가 대책없이 행동한다고 때리기만 하면 그 아이는 피동적인 인간이나 반항적인(나쁜 의미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랑의 매?  그런 것은 없다고 본다. 때리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사회에서는 위계서열이 중요했다. 원래 위례질서를 강하게 내세우는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폭력은 정당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위계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도 아니고, 더군다나 위계질서에 목숨거는 군인들이 통치하는 시대도 아니다.  신분의 고하에 의해 사람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자체에 대해 존재가치를 두는 체제에서 살고 있다.

 

요즘 보면 '개나 고양이'를 패는 사람은 짐승취급 받는다. 하물며 사람을 때려서야 쓰겠나?